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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원한 냉면을 토했다.
    소설 2021. 12. 20. 20:36

    시원한 냉면을 토했다.
    - 밤하늘 -

    - 직접 찍은 사진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무척 덥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었다.


    익숙한 국악 가락이 내 선잠을 깨웠다. 기차의 역 도착을 알리는 알림 노래는 벌써 한국어 안내를 지나 중국어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차를 타자마자 골아떨어졌던 나는 벌써 도착했을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잠을 청하려했다. 부산스럽게 사람들이 내리는 와중 한 사람이 내 팔을 치고갔다. 깜짝 놀라 깬 나는 벌써 그 다음역에 도착했나 싶어서 문득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알수 없는 한자들이 잔뜩 적혀있었지만 큰 대자 하나만은 읽을 수 있었다. 여기서 내려야한다. 나는 후다닥 짐을 챙겨서 뛰어내리듯 기차에서 내렸다. 시원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구의 뜨거운 열기가 폭풍처럼 나를 감쌌다. 아니 벌써 이렇게 덥다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역 안은 어느정도 시원했지만 자취방에 가려면 다시 나가야한다. 안에서 보기에도 타는듯한 햇빛이 동대구역 광장을 굽고있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큰맘먹고 자동문 앞에 다가갔다. 역을 나오고 고작 세발짝 걸었는데 땀이 났다. 나는 작게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어릴때부터 잦은 전학으로 여러 지역에서 살아본 바로 대구만큼 살기 좋은 도시도 많지 않지만 대구의 여름은 그 장점들을 다 상쇄할 만큼 사람을 힘들게한다. 얼른 시원한 에어컨이 기다리고있는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리쬐는 햇빛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저 나는 땅을 보고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버스 승강장까지의 거리를 재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앞에 웬 할머니가 나물을 팔고 계셨다.

    아니 이 땡볕에… 여기 앉아계신다고? 할머니는 작은 손부채 하나도없이 손수건을 얼굴에 둘둘말은채 대구의 강력한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계셨다. 한쪽 무릎을 세운채 땅바닥에 앉아 정체모를 나물을 다듬고 계신 할머니의 엉덩이에는 내 두 손바닥만한 박스가 한장 깔려있었다. 원래 저 색이었나 궁금증이 들 정도로 빛이 바랜 소쿠리 앞에는 할머니의 의자와 같은 박스가 놓여져 있었다. 그 박스에는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시금치 2000원
    시금치 2000원어치면 얼마일까. 그나저나 이 땡볕에 앉아서 장사하시다니. 진짜 힘드시겠다. 내가 조금 팔아드릴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만두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당장 2000원이라는 현금도 없거니와, 어짜피 내가 생 시금치를 사봤자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고 결국 버리게 될텐데 뭔가 할머니가 고생해서 캐신게 아깝다는 이유였다. 필요한 누군가가 얼른 시금치를 사가서 할머니가 더 늦기전에 집에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가까스로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버스는 나를 배신했다. 버스 안내 전광판은 내가 타야하는 버스가 도착까지 13분 남았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이 날씨에 13분이나 남은 버스를 기다릴 인내심이 나한텐 없었다. 택시를 타자. 버스 타려고 횡단보도를 하나 더 건넌것을 후회하며 택시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택시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경주마들 처럼 두줄로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 태양을 좀 더 빨리 피하기위해 부산스럽게 택시안으로 숨어들어갔다. 택시엔 시원한 냉방과 함께 7080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특유의 택시 냄새와 함께 에어컨 공기를 한번 들이마셨다. 좀 살겠다.
    ‘경북대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오랜시간 기다림의 결과가 고작 5천원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답없이 혀를 한번 차고는 출발했다.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종종 이런 택시기사를 만난다. 게중에는 대놓고 거기는 너무 가깝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는 기사들도 있다. 하지만 승차거부가 법으로 금지되고나서부터는 다시 내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누가 그러게 여기 역앞에서 줄서서 기다리랬나? 자기들이 돌아다니기 싫어서 기다려놓고선. 택시기사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백미러를 통해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럼 어쩔꺼야? 나는 일부러 핸드폰을 쳐다보며 못본체 했다.

    재수없게 택시 승강장을 빠져나오기 전에 신호에 걸려서 멈춰섰다. 나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대구의 땅은 여전히 구워지고 있었다. 아니 이놈의 도시엔 구름한점 없나? 보도와 도로를 경계짓는 난간에 그려진 그림들을 따라가다가 문득 모퉁이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곳엔 정말이지 아무도 이용할것 같지 않은 자판기가 서 있었다. 요즘시대에 자판기라니. 저런게 원래 저기 있었나? 누가 사용하긴 하나... 괜한 자판기를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제복을 입은 역무원 한분이 멀리서 자판기 쪽으로 걸어오셨다. 아버지뻘 정도의 연배로 보이는 역무원은 이 살인적인 더위에도 긴소매의 제복마의와 모자, 심지어 흰 장갑까지 끼고 계셨다. 기차역에서 제복 입은 사람을 보는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나는 세걸음 걷고 땀났는데, 저분은 한 걸음 딛자마자 땀이나셨겠지. 혹시 자판기로 가시는건가? 아니나 다를까 자판기 앞에 멈춰선 역무원의 구렛나루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역무원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고는 하나씩 자판기에 밀어넣었다. 저기서 뽑아진 음료수가 시원하려나 걱정됐다. 아이고 날도 더운데 그냥 역내 편의점에서 사드시지.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택시가 출발했다. 나는 끝내 역무원이 음료수를 꺼내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안녕히가세요-‘
    5200원을 결재하고 내리면서 택시기사분에게 인사를 건넸다. 택시기사는 대꾸도 안하고 재빨리 학교를 빠져나갔다. 세상 팍팍하구만.
    월요일의 학교는 활기차 보였다. 바로 집으로 안가고 구태여 학교에 내린 이유는 점심시간이 다 됐기 때문이었다. 단톡방에 점심먹을 사람들 과방으로 모이라는 공지가 올라왔었다. 택시시간을 계산해보니 얼추 맞을 것 같아서 나도 끼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먹고 출발했어서 그런지 배가 무척 고팠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때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건물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이미 점심 메뉴를 정한 것 마냥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 수업의 교수를 험담하는 무리가 내앞을 지나쳤다. 들고있는 교재를 보니 나도 들었던 수업이었다. 그렇게 나쁘진 않았었는데 저 학생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과방에 들어가니 늘상 있는 동기들이 죽치고 앉아있었다. 보나마나 점심메뉴를 아직도 못정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여러명이서 책상을 둘러싸고 앉아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 언제 내려왔어?’ 동기 한명이 아는체를 했다.
    ‘방금 도착했어. 밥먹으러 가자. 뭐먹어?’
    동기들은 입을 모아 아직 못정했다고 말했다. 그리곤 누군가가 나에게 먹고싶은게 있냐고 물어봤다. 메뉴를 정해줄 구원자가 나타난것에 기뻐하는듯 했다. 나는 먹고싶은건 딱히 없지만 우선 북문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북문에는 식당이 많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내 집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바로 집으로 도망갈 속셈이었다. 하지만 북문은 과방이 있는 위치와 거리가 조금 있었기 때문에 몇명은 탐탁찮아 했지만 또 몇명은 다음 수업이 그쪽이라며 환영했다. 결국 과반수로 북문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건물을 나오자마자 또다시 땡볕이 쏟아졌다.
    ‘잠깐만, 물좀 사가자’
    날이 너무 더웠던 탓에 갈증이났던 나는 매점과 학생식당이 같이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더웠는지 잠깐 바람쐬러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건물에 들어서자 점심을 먹으려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조형물로 만든 메뉴 안내 유리장맨 위에 돌솥불닭비빔밥이 HOT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위풍당당하게 놓여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유리장 앞에 서서 메뉴를 고민하다 내가 군대가기 전에는 없었던 무인 식권 발매기 쪽으로 가서 줄을 섰다. 점심시간이라 세 대의 무인식권 발매기도 학생 수를 다 감당하지 못하고 멀리까지 줄을 세워 놓고 있었다. 매점은 식당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 있는데, 그곳 역시 컵라면과 도시락을 사려는 학생들로 꽤나 붐볐다. 나는 물 하나만 얼른 사서 매점을 빠져나왔다. 시원한 물을 동기들과 나눠마셨다.

    이제 다시 나가려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남루한 행색이었지만 특히나 신발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낡아있었다. 자신이 있으면 안되는 곳에 있는것 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할아버지는 식권을 판매하고 있는 이모에게 갔다. 이모가 앉아있는 식권판매대 앞에는 커다랗게 ‘카드는 식권 발매기로’ 라고 쓰여 있었다. 요즘은 대부분 현금을 들고다니지 않으니까 이모는 옛날에 봤을때보다 한가해보였고 본인은 그것에 만족하는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껌을 짝짝 씹고 있는 이모에게로 가서 쭈뼛거리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두장을 내밀었다. 식권이모는 할아버지를 한번 흘겨보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이천원짜리 식권 한장을 끊어주었다. 할아버지는 식권을 손에 꼭 쥐고 인파속으로 들어갔다.
    이천원이면 식당에서 제일 싼 찌개정식을 먹을 수 있는 값이었다. 말이 좋아 정식이지 밥이랑 찌개에 나물 몇개를 반찬으로 더 얹어주는 메뉴이다. 뭔가 만들다만듯한 슴슴한 맛의 찌개 때문에 그 메뉴를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이고 좀 맛있는거좀 드시지… 오백원만 더 추가하면 라면정식을 먹을 수 있는데. 아냐 천원만 추가하면 산채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데. 우리학교 찌개는 진짜 맛 없는데… 잘 먹지도 않던 학생 식당 메뉴들이 할아버지 추천 메뉴로 마구 생각났다. 아무튼 2천원짜리 찌개정식은 진짜 아니었다.
    ‘형, 빨리 가자’ 한 동기의 재촉에 퍼뜩 정신이들었다.

    거의 기어가듯 북문에 도착했다. 땀이 비오듯 흘렀다. 나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은것을 후회했다. 밥이야 집에서 아무거나 시켜먹으면 됐었는데. 다행히 오는 길에 메뉴를 정했다. 날도 더우니 냉면이나 먹자는 말에 반대는 없었다. 우리는 북문에 위치한 냉면집을 찾아들어가 각자 원하는 종류의 냉면을 시켰다. 이내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시원한 냉면으로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값이 조금 나가는 만큼 양이 많기로 유명한 냉면집이었지만 모두가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역시 여름에는 시원한 음식을 먹어줘야한다.

    다음 수업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 먹자마자 나왔다. 오늘은 일찍 씻고 집에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오늘 동기중 한명의 생일이라고 넌지시 귀띔해 줬다. 나는 왜인지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 생일에도 다같이 모여 축하받았기 때문에 별다른 이유 없이 빠지긴 어려웠다. 결국 7시 쯤 다같이 모이기로 하고 수업 있는 사람은 학교로, 없는 사람은 집으로 흩어졌다. 나도 얼른 자취방을 향해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자취방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컨을 최대출력으로 틀고 찬물로 땀을 닦아낸 뒤 침대에 널부러졌다.
    ‘이놈의 도시, 살 곳이 못되는구만..’
    괜히 혼잣말 했다. 일찍 내려오려고 일찍 일어난 탓인지, 날이 너무 더웠어서 지쳤던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아직 저녁까지 시간이 있으니 조금 자야겠다. 나는 이내 잠에 들었다.

    한여름이라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완전히 다 지지 않았다. 학교가 끝난 학생들이 가장 번화한 북문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어디론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 표정은 분명히 수업들으러갈때보다 밝아보였다.
    ‘어 여기.’
    제일 마지막에 온 동기가 다와서 뛰어오는 척을 했다.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우스갯 소리를 했다. 그렇게 늦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유쾌하게 넘기고 가기로 했던 술집으로 향했다.
    동기 몇명이 술집에 다 들어 갈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확인해보러 들어갔다. 나는 굳이 다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술집 입구 옆에 쪼그려 앉았다. 친한 동기가 옆으로 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한번 슥 올려다보고는 괜히 한마디 했다. ‘덥다아.’

    그때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 한분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북문에서 돌아다니다보면 자주 목격되는 할머니다. 할머니가 모는 도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굴러가는지 의문인 유모차에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를 가뿐히 넘길만큼의 폐지가 쌓여있었다. 할머니가 유모차를 끄는건지 유모차가 할머니를 끄는건지, 할머니는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음을 내딛다가 유모차를 세우고 폐지 하나 주우시고, 또 내딛다가 폐지하나 주우시며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학생들은 익숙하게 할머니를 피해서 지나쳐갔다. 가게가 즐비해있어 폐지가 많이 나온다는게 할머니께는 행운이었을게다.
    ‘고생 많으시네..’
    무심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담배를 물고 핸드폰을 보던 동기가 그러게- 하며 맞장구를 쳤다.
    ‘요즘 고철같은것도 값이 많이 내렸다던데.. 진짜 고생이 많으시다.’ 나는 갑자기 자랑하고 싶었다. ‘난 그래서 그냥 쓰레기 분리수거통 같은데 안버리고 큰 봉지에 넣어서 건물 앞에 내놔. 그러면 한시간도 안되서 가져가시거든. 병 같은거 많으면 좋아하시기도 하고..’ 나는 내가 내놓은 쓰레기를 누군가가 가져가는 것을 본적이 없다. 실제로 병을 많이 내놓으면 좋아하시는지도 잘 모른다. 근데 그냥 그럴것 같았다. 병이 더 비싸니까. 나는 마치 영웅담을 늘어놓듯 일장 연설을 했다.
    ‘오 나도 앞으로 그래야겠다’ 친한 동기가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야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 하시지’ 나는 우쭐댔다.
    마침 자리가 났는지 동기들이 들어가자고 소리쳤다. 나는 일어나서 바지를 털고 할머니가 사라진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술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기 생일이라 꽤나 거나하게 마셨다. 근래에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왠지 술을 많이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재밌진 않았던것 같은데. 동기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자취하는 사람들만 더 남아서 소주를 몇병 더 비웠다. 술김에 계산은 내가 할테니 내일 정산해달라고 큰소리치며 먼저 가는 사람들을 보냈다. 젓가락을 몇번 떨어뜨렸고, 물을 몇번 엎지른 것을 보니 많이 취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술을 잘 못마신다. 아마 내일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겠지. 하지만 왠지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시고 싶어, 집에 간다던 동기를 몇번씩은 붙잡았다. 내일 아침수업이긴한데 이미 마음속에서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아까 같이 문 앞에서 기다렸던 동기만 내곁에 남았다. 녀석도 이미 내일 수업에 가지 앉을 작정인듯 했다. 우리는 술집에 가득 찼던 사람들이 거의 다 빠졌을 때 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값이 얼마였더라.. 내일 확인하면 되겠지 싶어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술집에서 나오자 뜨거운 공기가 나를 덮쳤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더위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열대야가 벌써 시작됐나보다. 내 자취방에서 자고가기로 한 친한동기와 비틀대며 걸었다. 녀석은 담배를 피며 걸었다. 텅빈 거리에 아무 거리낌 없다는듯 연기를 하늘로 내뿜었다.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차가운 공기는 커녕 담배연기만 들어오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집앞 편의점에서 숙취음료를 사서 나눠마셨다.
    ‘이젠 밤에도 덥네.’ 동기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에어컨 키고나옴.’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낭비 쩌네.’ 동기가 한마디 던졌다.

    ‘낭비가 아니고 임마 개더우니까 그렇지…’
    날이 이렇게 더워서야 어쩌나..
    문득 오늘 본 사람들이 생각났다.
    ‘야 우리는 집에 가면 에어컨이라도 있지. 아까 그 폐지 줍는 할머니 집에는 없을거아냐.’ 내가 말했다.
    ‘갑자기? 그건 모르지.’ 동기는 관심없다는 투로 맞받아쳤다.
    ‘그러면 엄청 더우실텐데...’
    머리가 아파왔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어. 야. 존나 덥기도 했지만 오늘은 진짜 이상한 날이었다니까?’
    속이 매스꺼웠다.
    ‘괜한걸 너무 많이봤어. 날이 이렇게 더운데 말이야… 왜이렇게 더운거야? 너무… 힘든 사람이 많아.’
    나는 횡설수설 했다. 동기는 무슨말을 하고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청… 엄청 힘들겠지 다들’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오는듯 했다.
    ‘그냥…’
    안돼.
    ‘그사람들이 너무 불ㅆ...’
    하루종일 입안에서 씹히던 말을 뱉으려고 했다. 하루종일 좋지 않았던 기분과 지금의 숙취가 모두 그 말이 속에 얹혀서 그런것 같았다. 그러자 내 속 깊은곳에서부터 구토가 올라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우웩..!‘
    동기가 깜짝놀라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피했다. 나는 전봇대를 잡고 두번의 헛구역질 끝에 오늘 먹은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동기가 슬금슬금 옆으로 와서 어정쩡한 자세로 등을 두들겨 줬다.

    눈물이 핑 돌았다. 괜히 술을 먹었다. 눈물과 침과 땀이 범벅이 되서 눈을 뜰 수 없었다. 두어번 정도 더 개워내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됐다. 고개를 숙인채로 눈물을 닦고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사방에 점심에 먹은 냉면발이 낭자했다. 점심에는 내속을 시원하게 해주더니, 지금은 내속을 뜨겁게 하는구나.
    ‘우체국 택’
    내가 게워놓은 곳 밑에 깔린 겉이 찢어진 택배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하필 전봇대 밑에다가 택배박스들을 모아서 갖다논 것이다.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나는 뭐가 웃겼는지 피식 웃었다. 내일와서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동기의 부축을 받으며 자취방에 들어왔다. 속이 쓰리고 목이 아프고 입안이 까끌했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 양치질만 하고 침대위에 쓰러졌다.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힘껏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평소보다 일찍 잠이 깻다. 문득 어제 토 한 것이 생각났다. 나는 빈 생수통에 물을 가득 담아서 들고 내려갔다. 쓸데없이 존재하는 양심을 욕하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어제 그 전봇대를 찾았다.
    그곳엔 누군가가 내 분비물을 털어낸 흔적만 있고 박스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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